
재미있는 우리말 이야기 #4 개판 5분 전
개판 5분 전. 상태, 행동 따위가 사리에 어긋나 온당치 못하거나 무질서하고 난잡한 상황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흔히 개판이라고 하면 개들이 무질서하고 난잡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개판이라는 말은 개(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열 개(開)' 자와 '널조각 판(版)' 자를 쓴 한자어다.
어원은 한국전쟁과 관련이 깊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많았던 부산 등지에서 식량 배급이 있었는데, 이때 밥을 나눠주기 전에 곧 가마솥을 열겠다는 뜻으로 '개판 5분 전'이라고 했다고 한다. 5분 뒤에 밥을 나눠주겠다고 했으므로 당연히 일제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 지역이든 개판 5분 전이 되면 개(犬)판과 비슷한 광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른 설도 있다. 바로 '고칠 개(改)' 자를 쓴 씨름 용어 개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씨름을 하다 두 사람이 함께 넘어지면 누가 이겼는지를 놓고 다투게 마련이다. 이로 인해 한 판을 다시(개판) 하게 됐다면 분명 개판 5분 전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임을 가정할 수 있다.
둘 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국립국어원에서도 공식적으로 개판의 어원이 무엇인지 밝히지는 않고 있다. 확실한 것은 어원이 무엇이든 개(犬)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개판'과 '개판 5분 전'이라는 말로 인해 개(犬)는 무질서와 혼란의 대명사가 됐다. 사람들은 온갖 나쁜 것에 개를 붙이곤 한다. '개(犬) 같다'는 말은 욕 중에서도 아주 심한 욕에 속한다. 이래저래 개는 억울하다.
속담을 찾아봐도 그렇다. '술 먹은 개'라는 속담은 정신없이 술에 취해 행동을 멋대로 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이다. 그리고 앞에서는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무 상관도 없는 만만한 대상에게 화풀이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는 '남에게 매 맞고 개 옆구리 찬다'라고 표현한다. 속담이 워낙 많아 어떤 동물이 나오는지 찾는 것보다 등장하지 않는 동물을 찾는 편이 편하겠지만, 여러 동물 중에서도 유독 개는 가장 심한 피해자다.
물론 요즘은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속담이 자주 쓰일 만한 일들이 자주 보이기도 한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은 놀고 있는 개가 부럽다는 뜻으로, 일이 분주하거나 고생스러울 때 넋두리로 하는 말이다. 또는 제 팔자가 하도 나쁘니 차라리 개 팔자가 더 좋겠다고 넋두리로 하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 대형 마트를 들르면 개가 먹는 음식이 사람이 먹는 음식보다 좋아 보이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개만도 못한 인생'이란 말이 비유적 표현이 아닐 수도 있게 됐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말에서 개는 여전히 약자이며 피해자다. 개판 5분 전이라는 말의 어원을 밝힌다면 개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어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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