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야구 이야기로 시작하겠다. 현역 은퇴 후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투수 봉중근과 아직도 현역인 내야수 오재원의 공통점은 국제대회, 그중에서도 일본전에서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는 점이다. 봉중근은 한국이 준우승했던 2009 WBC에서, 그리고 오재원은 한국이 우승을 차지한 2015 WBSC 프리미어12 일본전에서 강한 인상을 남겨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일본전 승리를 이끌며 견제 동작만으로 일본 야구의 상징이었던 스즈키 이치로를 두 번이나 긴장하게 만든 봉중근은 '봉의사'로 불렸고, 일본 투수의 공을 치고 방망이를 시원하게 내던진 '배트 플립'으로 아직도 회자되는 오재원은 '오열사'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왜 봉중근은 '의사(義士)'고 오재원은 '열사(烈士)'일까?
사실 봉중근의 경우 성만 다르고 이름은 같은 안중근 의사의 영향이 크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의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의로운 사람'이고, '열사'는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이라는데, 과연 이것만으로 의사와 열사를 명확히 구분해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에서는 좀 더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열사'는 '맨몸으로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내는 사람'이고 '의사'는 '무력(武力)으로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을 뜻한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의사와 열사의 개념을 비교적 명확히 할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무력으로 항거하고 의롭게 죽었으니 의사가 된다. 그리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석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 이준은 맨몸으로 저항하며 지조를 나타냈으니 열사가 되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봉중근은 의사가 될 수 없다.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역시 안중근 의사와 이름이 같아 '봉의사'라는 명예로운 수식어가 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오재원은 맨몸으로 저항해 자신의 지조를 나타낸 적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다.
한국 야구사에 남을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는 2015 WBSC 프리미어12 준결승 일본전 대역전극의 시작은 0-3으로 뒤지던 9회초에 나온 선두타자 오재원의 좌전안타였다. 오재원은 1루로 출루하던 중 주먹을 불끈 쥐었고, 그 뒤로 기세가 오른 한국은 기적적인 역전승을 만들어냈다.
패색이 짙은 경기에서 상대 배터리의 심기를 건드리며 끝내 출루해냈으니 맨몸으로 저항하며 자신의 지조를 나타냈다고 할 만하다. 기억에 더 많이 남은 장면은 일본 야구의 심장 도쿄돔에서 보여준 멋들어진 배트 플립이었지만, 승리를 이끈 한 방은 8회까지 한 점도 내주지 않던 일본 마운드에 균열을 일으킨 좌전안타였다. 이 안타가 있었기에 배트 플립의 기회도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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